2008년 08월 23일
[단편]블라인드 (下)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도희는 순간 허를 찔리고 말았다. 어쩌면 그는 우연히 여기에 뛰어들었을 뿐 사건과는 아무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 라고도 생각했지만 상식적으로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잘린 손목은 계단 위에서 굴러왔고,
그 장소에는 바로 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아무 상관없을 리는……없지 않은가.
그런 도희의 고민과 자신은 무관하다고 말하려는 듯, 백인식은 시종일관 싱글벙글 기분 좋게 웃고 있다.
도희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와 마지막으로 했던 통화에서 백인식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때 그는 도대체 무엇을 알리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는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일까.
거기다 지금 그는 지금……도대체 뭘 그렇게 열심히 먹고 있는 것일까.
도희의 시선은, 계속해서 뭔가를 입안에서 우물우물 거리고 있는 그의 턱 움직임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의문은 한없이 늘어가지만, 해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도희는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이봐, 나는 대체 언제부터 속고 있었던 거지?”
이윽고 백인식은 입 안에 있는 덜 씹힌 것을 조금은 성급하게 꿀꺽 삼킨 다음, 자유로워진 입을 사용해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속인 적 없습니다, 누님.”
그렇게 대답하는 그는 충분히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광기 같은 것은 거의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질이 더 나쁘다.
그는 본래 그런 인간이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가 본래대로 돌아가 다시 무해한 존재가 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도희는 갑자기 숨이 갑갑하게 느껴져 넥타이를 풀었다.
“그렇군. 아무래도 나는 실수를 한 것 같네. 다른 사람에 대한 것보다 오히려 당신 자신에 대해서 먼저 물어봐야만 했어.”
카하하 하고 백인식은 웃었다.
“농담도, 누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요.”
“하지만 당신은 충분히 그런 것처럼 보이는데?”
“지금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것도 같군요. 아마 단 한 단어로 정의하는 것도 가능하겠죠.”
식인귀, 라고 도희는 들리지 않게 중얼거린다. 그녀는 백인식이 방금 목구멍으로 삼킨 것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은 욕망을 느끼기 시작했다.
“있잖습니까, 누님. 저는 누님이라면 분명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뭘?”
“사람이 사람을 먹는 이유가 대체 뭘까요?”
그 말을 들은 도희는 잠시 생각한 다음, 이제는 진부하기까지 한 어떤 단어를 말했다.
“사랑하기 때문이지.”
백인식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오르가즘에 빠진 듯한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이를테면,
아마존 유역과 뉴기니의 여러 원주민 부족들은 자신의 늙은 아버지를 살해해서 먹는 것이 부모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행위라고 믿는다.
고대 티베트인들은 자신의 내장을 무덤으로 바치기 위해 그 부모를 먹었다.
디에리 부족의 사람들은 ‘우리는 그를 잘 알고 있고, 그를 매우 사랑하기 때문에 먹는다.’라고 말한다.
자신을 카니발리즘의 대부라고 자칭하는 사가와 이세이라는 사람은, 자신이 너무나 사랑했던 소녀의 머리에 총을 쏘아 그 고기를 먹었다. 그는 자신이 그녀를 먹으면 그녀는 영원히 그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성욕과 식욕은 여러 부분에서 흡사한 구석이 있다.
특정인에 대한 성욕은 대부분 그 대상을 자신만이 독점하고 싶다는 욕구로 이어진다. 그리고 무언가를 먹는다는 행위는 독점욕의 온전한 그리고 야만적이고 순수한 표출방법이다.
결코 사랑스럽지 않은 생김새의 음식물을 먹는 것은 누구나 꺼릴 것이다. 그렇다면, 바꿔 말하자면 정말로 사랑스러운 것을 보면 자연스럽게 먹고 싶어지지는 않을 것인가?
백인식은 이미 자신의 내부에서 들리는 수많은 목소리 중에서 성욕과 식욕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먹는다는 행위는 분명히 자신이 가진 사랑의 증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이전에 ‘먹는다’라는 단어를 성행위를 뜻하는 의미로 사용한 적이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분명히 속어로 쓰인 것이 아니라, 아마 무의식적으로 그가 자신의 본질을 말했던 것이 아닐까.
도희는 백인식을 노려보며 말했다.
“난 확실히 당신을 이해해. 하지만 이해와 용서는 분명히 다른 거지.”
“확실히 그렇지요.”
“그러니까 난 당신을 용서할 수는 없어.”
“충분히 이해합니다.”
백인식의 말투에서는 진심으로 그가 안타까워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도희는 그것을 깨닫고, 백인식이라는 인간은 이제 정말로 인간이라는 종의 규격에서 완전히 일탈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은 그에게 있어서 죄책감을 느낄만한 대상조차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제가 법에 의해서 처벌받기를 원하십니까?”
도희는 고개를 저었다.
“틀려. 나는 복수를 원해.”
그때, 백인식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은 도희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비웃음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는다.
그것을 눈치 챈 백인식이 “잠깐, 잠깐만요.” 하고 그녀의 성급한 행동을 막았다.
“저는 지금 기뻐하고 있는 겁니다. 누님이 제가 짐작했던 그대로의 사람이라는 것을.”
“난 지금 농담할 시간 없어.”
“글쎄, 분명히 손해 볼 일은 없다고 생각하니까 이번에는 한번 끝까지 들어보세요. 저는 방금 누님이 도덕을 운운하며 저를 책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 겁니다. 그리고 법과 사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건 언제나 선량한 약자죠. 당신은 방금 법의 도움을 받는 방법을 포기하고 개인적인 복수를 원했어요. 그렇다는 것은 즉 당신은 대부분의 약자가 아닌,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백인식은 두 팔을 들어올렸다.
“당신 역시 나와 마찬가지인 사람이라는 것이죠.”
도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차갑게 웃으며 그를 비웃었다.
“웃기지 마. 남을 함부로 자신과 동류로 취급하려 하다니, 앞뒤분간도 못 하는 어린애 같은 짓이잖아?”
“……누님.”
“듣자듣자 하니까 자신이 무슨 생태계의 정점에 있는 맹수가 된 것처럼 말하는데, 그건 착각일 뿐이야. 넌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그저 불쌍한 생물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아둬.”
“이 빌어먹을 년이!”
순간 화를 참지 못한 백인식이 성큼 계단을 내려오며 도희를 붙잡으려 한다. 그러나 도희는 재빨리 옆으로 물러나며 그의 왼쪽 손목을 붙잡았다. 앞으로 몸을 내미는 타이밍에 맞춰 어깨를 축으로 팔을 등 뒤로 돌려 꺾었다. 그러자 자연히 백인식의 몸은 계단 아래로 밀리게 되었고, 그는 재빨리 한쪽 발을 뻗어 몸을 겨우 지탱했다. 도희는 그 순간을 노려 재빨리 그 등 뒤로 몸을 이동시키며 자신의 오른팔을 상대의 턱 아래에 찔러 넣어 목을 조르려고 했다.
그러나 등 뒤에 있던 그녀는, 팔뚝이 목에 닿기 직전에 백인식의 턱이 커다랗게 벌어지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아악!”
마치 불에 타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팔뚝 전체로 퍼지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만 백인식이 자신의 이빨로 도희의 팔뚝을 콱 물어버린 것이다. 도희가 비명을 지르며 재빨리 남자의 몸을 앞으로 밀어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손가락 하나나 둘쯤은 쉽사리 날아가 버릴 뻔 했다. 그 정도로 턱에 실린 힘이나 살기가 무시무시했던 것이다.
지금이라면 믿을 수 있다. 저 남자는 이빨로 물어뜯는 것만으로 사람을 가볍게 죽일 수 있다. 아니, 분명히 그렇게 사람을 죽인 적도 있을 것이다.
팔뚝 위에 둥그스름하게 이빨 자국이 났고 피도 조금 배어있었지만, 그것에 신경을 쓰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도희는 자신이 손에 쥐고 있던 넥타이를 힘껏 잡아당겼다. 그러자 백인식이 숨이 막히는 듯 얼굴이 창백해진다. 도희의 손에 있는 넥타이의 반대편 끝이, 조금 전부터 그의 목에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목조르기를 페이크삼아 걸어둔 넥타이를 곧바로 눈치 채지 못했던 탓에, 끈이 꽉 조여지고 나서는 손가락을 집어넣을 만한 틈도 없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상대와의 거리를 벌리며 당기지 않는다면 두 사람 사이에 수평으로 이어진 넥타이는 자신이 쓰인 역할을 해낼 수 없다. 상대 역시 그것을 모를 리가 없고,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끈을 풀어냄과 동시에 도희를 제압해버리려 할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되면 승산은 거의 없다. 애초에 수평으로 매달린 끈이, 교수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것을 수평에서 수직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그 넥타이는 놈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될 것이다.
그 방법이 무엇인지,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도희는 이 근처에서 유일하게 빛이 비치고 있는 창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녀의 몸이 공중에 붕 떴고, 그 힘에 이끌린 백인식이 창틀에 몸을 부딪혔다. 그는 자신의 목에 매달린 넥타이에 걸린 무게에 의해 창 밖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힘껏 버티기 시작했고, 그 아래에는 단지 한 줄의 넥타이만을 생명줄 삼아 허공에 매달린 도희의 모습이 있었다.
도희는 자신의 체중을 오로지 한 손에 말아 쥔 넥타이로만 버티고 있었고, 그 결과 그녀의 몸무게는 온전히 백인식의 목을 조르는 힘이 되어 작용하고 있었다.
백인식은 유일하게 자유로운 한 손으로 넥타이를 반대로 잡아당겨 가해지는 힘을 줄이고 있었지만, 그래도 점점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곧 질식할 것이다.
하지만 백인식도 그렇게 모든 걸 끝낼 마음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숨이 막혀 계속 더듬거리면서도 억눌린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여, 역시 대단해……누님. 하, 하지만……정말 내가 어떻게 할 수……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건 아니겠죠……? 나, 이대로……밑으로 뛰어내릴 겁니다. 누님과 함께……크, 커컥!”
백인식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크,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 될지……알겠지요? 둘 다 그걸로 죽지는 않겠지만……다리 정도는 화, 확실하게 부러지겠죠. 그러면 누님은 나한테 죽을 거예요……. 그리곤 아마 나도 달아날 수 없게 되어……겨, 경찰에 붙잡히고 말겠죠.”
그의 말 그대로, 그렇게 된다면 도희는 확실하게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왠지 그렇게 할 마음은 그다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일단 진정하고……귀를 기울여 들어봐요. 누군가가……당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쿨럭……이제 알겠어요? ……당신이 원하는 그 사람은 아직 살아있어요.”
도희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지만, 그 말대로 집중해서 들으니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 같은 것이 들린다. 바로 도희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고 있다.
“사실은……운이 좋았던 거예요……그러니까, 이제 장난은 끝내죠……누님.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처음에 이미 나는……당신을 인정했어요. 그러니까……당신은 나에게 당신의 권리를 주장하면 되는 거였어요.”
백인식은 마치 토마토처럼 시뻘개진 얼굴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윙크했다.
“누님……이건 처음부터……당신이 한 마디만 했으면 되는……간단한 문제였다는 거라구요.”
Epilogue
“……으윽.”
도희는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오른팔에서 찌릿한 통증을 느끼고 인상을 썼다. 팔뚝 위에 사람의 턱 모양대로 둥그스름하게 새겨진 깊은 이빨 자국은 남들의 오해를 사기 딱 좋은 대상이어서, 지금 그녀는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팔이 긴 셔츠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랬더니 오히려 팔뚝에 문신을 새기고 있다는 오해를 받게 되었다. 도희는 지금 아무나 붙잡고 불평을 해주고 싶은 억울한 심정이었다.
도희는 드라이브로 울분을 삭이려는 듯 과감하게 자동차의 속력을 올렸다.
병원 주차장에 차를 세운 다음, 조수석 데시보드에서 뭔가 조그만 상자 같은 것을 꺼내어 들고 병실로 올라갔다. 문이 열리는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한 목소리가 도희를 반긴다.
“늦어어!”
“시끄러워. 이것도 빨리 온 거라고.”
도희 역시 투덜투덜거리며 대꾸했다. 래이는 여전히 어울리지 않는 새빨간 선그라스를 끼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이번에는 3주간 입원 예정. 지나친 정신적 쇼크로 인해 자율신경이 혼란을 일으켜, 안 그래도 약한 몸의 밸런스가 나빠진 것이 원인이다. 그것 말고는 사실 몸에 상처 하나 없다. 어느새 손목이 하나 없어져 있다던가 하는 일도 물론 없었다.
……그렇다면 그 잘린 손목의 주인은 누구였던 것일까.
2 마이너스 1 이퀄 1이라는 문제만큼 간단한 문제다.
그렇다.
바로 진채윤의 손목인 것이다.
도희는 래이에게 자신이 알고 있던 진채윤의 과거사와 새로 조사한 내용을 모두 이야기해주었다.
“……그녀는 아마도 어머니가 되고 싶었던 것 같아. 너는 말하자면 ‘가상의 아이’였던 거지.”
“내가?”
“나쁘게 듣지 마. 넌 눈도 보이지 않고 몸집도 작고 몸도 건강하지 않지. 그런 핸디캡을 가진 덕분에, 너는 진채윤에게 있어서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비춰졌던 거야.”
“…….”
“그녀를 이해하려면 우선 그녀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어. 거기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 아까도 말했다시피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무서운 학대를 받으며 자라났는데,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진채윤이 부친의 정부의 딸이라는 사실을 어머니가 알게 된 다음부터 시작된 것이었지. 그 뒤로, 그녀는 항상 자신을 사랑하던 어머니가 도리어 자신을 학대하기 시작했다는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했어. 어른들의 사정 같은 것을 이해하기는 어린 나이였으니까.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어머니란 자신의 자식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지켜주는 존재로 생각되었던 것이지. 그런 현실과의 괴리 속에서 아마 진채윤은 서서히 이상 속의 존재에 대한 동경을 키워가기 시작한 거야. 그때부터 이미 남들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던 그녀는 그런 어머니를 찾기보다 자기 스스로 그런 이상적인 어머니가 되어 남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은 거지. 말하자면 스스로 본보기를 보이려고 했던 거야. 꽤나 어른스러운 생각이었지만 그때 겨우 중학생이었던 진채윤에게 아이가 있었을 리는 물론 없었지.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학급생 중에서 그 역할을 대신할 대상을 찾았던 거야. 하지만, 그녀는 본인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어머니는 될 수 없었지. 어째서라고 생각해?”
“사실은 지켜줄 필요 따위 없었기 때문에?”
“맞아. 실제로 그녀의 학급에서도 부모에게서 학대를 받고 있는 것은 진채윤 본인 밖에 없었지. 그녀가 선택한 ‘가상의 아이’도, 사실 학대 같은 걸 받고 있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지. 바로 거기서 문제가 생긴 거야. 그래서는 도저히 자신이 바라는 진정한 어머니의 모습은 보여줄 수가 없었지.”
“그래서 결국……?”
“그녀가 어떻게 처음 그런 짓을 시작했는지는 몰라. 어쩌면 사소한 실수나 오해같은 것일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해서 그녀는 큰 만족감을 얻을 수 있었고, 결국 계속해서 그런 병 주고 약 주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게 된 거지. 그러나 그녀가 정말로 진정한 어머니가 되려면 그런 짓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고, 그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녀의 정신은 기억을 지워버리는 방법을 택한 거야. 그걸로 겨우 그녀의 정신은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지.”
“하지만 그 날, 그녀의 정신은 붕괴 직전이었어.”
“이미 스스로 자신에 대한 의구심이 자랄 대로 자라나 있었던 거야. 그랬던 것이, 그때 우리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된 일을 계기로 해서 단번에 기폭되어 버린 셈이지.”
래이는 몸을 떨었다.
“우리 때문일까……?”
“그렇게 생각하지 마. 그건 분명히 그녀 스스로 원한 일이었어. 너도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고 했잖아?”
“하지만, 그녀는 죽었어. 나를 지키려고.”
“그것 역시 그녀가 원했던 일이었어…….”
그렇다.
그날 진채윤은 백인식의 손에 죽었다.
래이를 대신해서.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래이를 지키려고 했다.
그 결과 래이 대신 자기 자신이 희생되고 말았다.
그녀의 시체는 잘린 손목밖에 발견되지 않았다. 나머지 부분을 백인식이 어떻게 처리했는가는 도저히 알 수 없다.
상상하려 하면 상상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러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진채윤은 분명히 그런 결과라 해도 만족했을 것이다.
진채윤은 처음부터 래이를 일부러 위험에 빠뜨린 다음 자신이 지켜주기 위한 목적만으로 래이를 그 사건현장으로 데려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로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계획이 아닌가.
범인은 언젠가 현장으로 돌아온다는 속설만을 믿고, 언젠가 식인귀가 돌아올 것을 기다리기 위해서 그곳으로 향했던 것이다.
만약 그렇게 우연이 겹치지 않았으면, 그녀는 대체 그곳에서 며칠을 기다릴 셈이었을까? 그런 판단도 내리지 못할 만큼 그녀의 정신이 균형을 잃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고…….
“그때, 그녀는 분명히 자기 자신이 되고 싶었던 진정한 어머니가 된 걸 거야.”
래이를 죽이려고 하는 백인식에게 용감하게 맞섰다고 한다.
물론 그녀는 상대가 될 수도 없었지만, 래이를 대신해서 죽음을 택하는 걸로 래이의 생명을 연장시켰다.
그녀는 래이 앞에서 죽어가면서도 계속해서 “괜찮아, 괜찮아.”하고 래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최후의 순간에 그녀는 자신의 소망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자기 자신을 증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라는 존재가 그렇게까지 거창한 것이 될 필요가 있는 것일까?
좀 더……평범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그런 짓을 하지 않더라도 그녀는 충분히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백인식의 이야기이지만.
도희는 그 남자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덕분에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오해하고 있던 것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건물 3층에 매달린 상태에서, 도희는 그에게 선언했다.
래이는 자신의 것이라고.
그것만으로도 그는 래이를 완전히 포기했다.
맹수들끼리는 서로의 사냥감을 빼앗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유이다.
그것은 즉, 백인식이 도희를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인정했음과 함께 그녀 역시도 그것을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질적으로 그녀 또한 그와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긍정한다는 뜻이다.
그것으로 백인식은 자신의 깊은 이해자가 또한 자신과 동류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는 최대한의 만족감을 표시하며 미련없이 떠났다.
이제부터 영원히 어둠 속을 걷겠다고 마음먹은 자에게 있어 가장 큰 두려움은 바로 고독이기 때문이다.
……결국 쓸쓸함을 잘 타는 어린애였을 뿐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에 대한 오해가 조금 있었는데, 사실 식인귀 사건에서의 식인귀는 백인식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의 그는 어엿한 식인귀이지만, 그 시점에서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진짜 식인귀 사건은 어처구니없는 결말을 내고 이미 수사가 종결되어 버렸다. 물론 그 범인은 백인식이 아니다.
그가 처음으로 인간의 경계를 넘은 것은 바로 그날 밤. 나를 속인 적은 없다고 했던 그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고, 사건현장에서 다시 마주치기 전까지 내가 보았던 그는 정말로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째서 그렇게 되어버렸는가?
그 해답은 바로 래이에게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래이의 기이한 두 눈과 지금도 끼고 있는 저 이상한 빨간 선그라스에 있었던 것이다.
그 날, 도희와 헤어졌던 백인식은 진채윤의 전화를 받았다. 그것은 도희마저 간과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인데, 진채윤의 협력자들의 집단이 바로 그 ‘팬클럽’이었다고 한다면 백인식 또한 엄연히 그 중 하나였던 것이다. 진채윤의 뒷조사를 하게 되면서 그녀에게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고 해도, 애초부터 그는 자신이 밝힌 바대로 그녀의 몸만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꺼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그때 자동차를 몰고 래이를 납치하는 것을 도와준 것이 바로 백인식이었다는 말이다. 그 외의 협력자 모두는 자가용이 없었고 그것을 확인까지 했었지만 정작 백인식의 경우에는 차를 몰고 나타나는 것을 뻔히 보고도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백인식은 래이와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만나서는 안 되는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것이다.
대화라고 할 만큼 주고받은 말도 없었지만 래이는 그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어보았다.
……말 그대로 눈으로 보고 만 것이다. 래이는, 사람을 먹는 것으로 세계와 관계한다고 하는 그의 숨겨진 본질이 가리키는 벡터를 확실하게 관측할 수 있었다.
여기서 잠깐 이해를 돕기 위한 예를 들자면,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비유가 있다.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면, 내부가 보이지 않는 상자 속에 있는 고양이는 살아있으면서 또한 죽어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한 모순적인 현상은 그 고양이를 상자 속에서 꺼내기 전까지 계속되는데, 중요한 것은 고양이를 상자에서 꺼내려는 행동 자체가 고양이를 죽이거나 살릴 수 있다는 점이다.
관측 행위 자체가 실험의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대표적인 예로 사용되고 있다.
거기에서 더욱 발전해서, 최근 물리학에서는 ‘객관적인 실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관측되는 순간 창조되는 것이다.’ 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즉, 래이는 백인식이 갖고 있을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를 관측해서 그것을 인지함으로서 그것을 기정사실로 만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도, 자신의 동급생을 칼로 찌른 그 소년처럼 드러나 버린 이상 이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닐까.
아무튼 그 결과, 이제 그는 자신이 누릴 수 있었을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삶과 행복을 모두 버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대기업 입사를 청운의 꿈으로 삼고 있던 수수한 젊은이는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그가 이 사건을 통해서 잃어버린 것 역시 생각해보면 너무나 많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라는 것인가.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우습고 시시한 이야기다.
가해자인 줄 알았던 진채윤이 구원자가 되어 나타났고,
협력자인 줄 알았던 백인식이 가해자로 변신했는데, 또 사실은 피해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피해자로만 있을 것만 같았던 래이가, 사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해자로 변신해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었던 것은 나라는 이름의 어릿광대뿐이다. 이 시시한 사건의 한가운데에서 열심히 뛰어다니고, 마치 자신이 주인공인 것처럼 부지런히 얼굴을 내밀기만 했을 뿐, 결과적으로 나는 그동안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었고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로 상관없다.
앞으로 1년.
앞으로 1년이면 래이와 맺었던 계약의 때가 온다.
그때가 오면 싫어도 나는 이야기의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주인공으로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전까지는 편하게 어릿광대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하지만 지금도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있다.
도희는 그렇게 생각하며 래이의 빨간 선그라스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래이, 그 선그라스 좀 봐도 될까?”
“응? 뭐, 상관없지만.”
“이거 분명히 구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했었지?”
“응. 아마 다시 구하는 건 거의 무리일 거야.”
그렇다면 다행이지, 하고 도희는 생각했다.
그녀는 우선 선그라스를 바닥으로 똑바로 떨어뜨린 다음 발로 힘껏 짓밟아서 부숴버렸다.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은 래이는 그만 안색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무, 무슨 소리야 이거?!”
“아차, 이거 실수. 바닥에 떨어뜨린 걸 잘못해서 밟아버리고 말았어.”
도희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이런 위험한 물건은 없애두지 않으면 곤란하다.
또 어떤 말도 안 되는 녀석을 관측해버릴지 모르는 일이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는 래이를 달래며, 도희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러고보니 마지막으로 진짜 식인귀 사건 말이지만…….
그 사건에서 피해자 4사람을 죽인 것은 푼돈을 노리고 침입했던 2인조 강도였고, 그 시체를 먹은 것은 근처의 동물원에서 탈주했던 고릴라의 짓이었다고 한다.
더운 여름 날씨에 사흘간이나 방치되었던 시체들이 심하게 부패되는 바람에 검시 과정에서 그만 착오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런 오류를 범하게 된 경위도 정말 우연의 일치였는데, 2인조 강도가 피해자 네 사람을 모두 살해한 직후에 그들은 사람 소리 비슷한 것을 들었고, 그만 그대로 도망치고 말았다. 그런데 사실 그 소리의 주인공은 아무도 모르게 건물 3층에 숨어있던 고릴라가 낸 소리였고, 그 뒤로 그 고릴라가 어떤 미식가 짓을 했는가 하는 것은 일단 상상만 하도록 하자.
다만 일이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살인 현장에서는 현금이나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이 거의 고스란히 남아있었고, 그 때문에 수사관들은 이 사건이 금전을 노린 강도 살인이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죽인 것은 사람의 짓인데, 돈은 그대로 남아있고 사라진 것은 시체의 살점뿐이었다면…….
누구라도 뭔가 이상한 상상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시시한 이야기다, 정말.
그동안 들였던 열정과 시간이 아까울 만큼 시시한 이야기였다.
모든 사건들이 전말을 알고 보면 다 그렇게 느껴지듯이.
# by | 2008/08/23 03:30 | ┣완결 단편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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