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8월 23일
[단편]블라인드 (中)
자동차로 병원에 도착한 도희는, 조금 전 아침식사로 구입한 초밥 한 상자를 손에 들고 래이의 병실에 들어갔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는 순간 래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희?”
“맞아.”
“올 거라고 생각했어. 아침부터 이 주위에서 두 사람이 보이고 있었거든.”
그 말에 도희는 래이가 끼고 있는 붉은 선그라스와, 또 그것 너머로 그녀가 지금 보고 있을 것들을 떠올렸다.
“다른 한 명은?”
“그거야…….”
래이는 말을 흐렸지만 도희는 그것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진채윤인 것이 틀림없다.
“심심풀이 삼아 조사해보고 있는데, 아무래도 진채윤이 수상쩍다는 것은 틀림없는 것처럼 보여.”
래이는 심심풀이라는 단어에서는 별로 신경쓰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지만, 진채윤이 의심스럽다는 말을 할 때는 역시 조금 충격이었던 것인지 미간을 찌푸렸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다소 독선적인 면이 있긴 하지만, 그녀는 정말로 나를 걱정하고 있었어.”
“아마도 그녀 역시도 그렇게 믿고 있는 거겠지.”
“나는 잘 모르겠어.”
마법처럼 도희의 손에서 마지막 초밥이 입 안으로 사라졌다.
“그래도 병원에 있는 동안은 아무 일 없을 거야.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전화해.”
그렇게 말하며 도희가 병실 문을 여는 순간, 그녀는 자신 앞에 누군가가 우두커니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채윤이다.
그녀는 어딘가 정신이 나간 듯한 멍한 표정을 지은 채 서 있었다.
그러다가 도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더니 깜짝 놀라면서 인사를 한다.
도희는 인사를 받아주려 했지만 진채윤이 순식간에 고개를 돌려버리는 바람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안녕? 몸은 좀 어떠니?”
진채윤은 도희를 완전히 무시하고, 래이에게 밝은 목소리로 그렇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병실 문이 쾅 하고 닫긴다.
진채윤은 조금 전의 대화를 들었을 것인가?
자신이 조금 전에 래이에게 했던 말을 도희는 지금 스스로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도희는 조금 전의 진채윤의 모습을 떠올리며 깊은 불안감을 느꼈다. 마치 넋이 나간 듯한 그녀의 모습에서는, 처음 보았을 때의 어른스러움과 타인을 배려하는 부드러운 미소는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 보았던 그녀의 모습이 가면이거나 거짓이었냐고 하면 그것도 정답은 아니다 . 도희는 그녀와 악수를 했을 때의 촉감을 떠올렸다. 거짓말을 하는 인간은 으레 손바닥에 땀이 조금이라도 배어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때 잡았던 그녀의 손에서는 약간의 습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바로 그녀의 마음이 평소와 같은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자각하고 있다면, 도저히 그렇게 할 수는 없다.
확실히 그럴 것이다.
만약 스스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가 자각하고 있었다면……그런 반응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거기서 유추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뿐이다.
도희는 이제야 진채윤의 마음속에 뚫린, 끝이 보이지 않는 깊숙한 구멍의 일부분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자동차 창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에, 겨우 도희의 의식은 그녀의 내부에서 해방되었다. 계속해서 뭔가를 생각하고 있던 것을 일단 멈추고, 창문을 두드린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한 다음 도어의 잠금을 풀었다. 시저스 방식의 도어가 빙그르르 하늘을 향해 회전하며 올라갔다. 백인식은 황송하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그 틈새로 몸을 집어넣더니 시트에 엉덩이를 걸친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이야기가 길어지다 보니 그만.”
“이렇게 기다리게 할 만큼 뭔가 중요한 것을 알아냈나요?”
도희가 그렇게 묻자, 백인식은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펴고 대답했다.
“들으시면 아마 놀라실 겁니다.”
도희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나 백인식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눈치다.
“우선 그 바이크의 주인을 알아냈습니다. 저희 학교의 학생인데, 같은 4학년이지만 저와 그다지 가까운 관계는 아닙니다. 학부도 다르고 해서 별로 대화를 나누어본 적도 없지요. 하지만 진채윤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것을 여러 번 본 적이 있습니다.”
백인식은 바이크 주인의 이름과 연락처, 주소를 말했다. 도희는 그것을 메모하면서 물었다.
“그 사람이 확실한가요?”
“확실합니다. 가게에서 물어봤더니, 그가 바이크를 구입하면서 레이싱 슈츠와 헬멧도 함께 사갔다고 하더군요. 사고 현장을 목격했던 후배와 함께 가서 샘플을 보여 달라고 했더니, 둘 다 그때 본 것과 똑같았다고 합니다. 그쯤 되면 확률 같은 걸 따질 필요도 없이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죠.”
도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인식의 후배가 증인으로 나서줄 가능성은 희박할 테니 뺑소니로 잡아넣기 위한 증거로 사용하기는 곤란하겠지만, 어떻게든 사용할 방법은 있다. 뭐하면 목격자를 사칭해서 익명으로 협박을 가하는 것도 썩 나쁘지 않은 수단이고.
“그리고 이쪽은 또 예상치 못한 큰 성과였는데요, 사실은 제가 조금 전에 저기서 만났던 사람이 바로 진채윤의 중학교 동창이었습니다. 고등학교로 진학하기 직전에 먼 지방으로 전학을 가는 바람에 고등학교 동창은 찾을 수 없었지만, 뭐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쪽에서도 어떤 생활을 했을지는 뻔하더군요.”
“이유가 있는 전학이었던 모양이군요.”
“눈치가 빠르시군요, 누님. 네, 말씀대롭니다. 중학교 3학년 무렵에 일이 터졌다고 하더군요. 요약해서 말하자면, 학급생 중 한 명에게 몰래 왕따를 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던 겁니다. 그리고 어른들은 모두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죠. 왜냐면 진채윤은 자신이 왕따를 시킨 그 학생의 절친한 친구였던 겁니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그 학생은 벌써 자살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을 정도로 친했죠. 그녀가 뒤에서 어떤 짓을 하고 있었는지, 같은 학급의 학생들도 대부분 몰랐습니다. 오로지 같이 왕따를 하고 있던 소수의 무리들만이 그녀의 숨겨진 본질을 알고 있었어요. 그녀가 바로 그들의 보스였고, 뒤에서 왕따를 지시하던 장본인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들도 진채윤이 어떤 인간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진채윤이 왕따 학생에게 친절함을 보여주는 것이, 나중에 배신감을 안겨줘 더 큰 괴로움을 주기 위한 사전공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진채윤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녀는 정말로 왕따를 당하던 학생의 힘이 되어주려고 생각하고 그대로 행동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면 1년 가까이 시간이 지날 때까지도 그녀의 그런 상냥함에 의구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그렇겠지…… 하고 도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의 행동은 설명될 길이 없으니까.
“그녀는 뒤에서 음습한 방법으로 왕따 학생을 괴롭히는 동시에, 역시 또 진정으로 그녀를 위해서 모든 정성을 다 쏟아 상냥하게 대해주었던 겁니다. 졸업이 가까워질 무렵에야 겨우 자신들의 보스의 행동에 의구심을 갖게 된 한 학생이 모든 걸 다 털어놓았을 때, 비로소 모든 전말이 밝혀지게 된 거죠. 선생들이나 학부형들이 받았을 충격이 어느 정도였을지는 상상도 안 갑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채윤은 자신이 뒤에서 왕따를 주도했다는 사실을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고 하더군요. 어른들도 한번은 마음이 흔들릴 뻔 했지만, 상황증거가 너무 명백해서 이론의 여지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그녀는 퇴학 대신에 전학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지요. 다만 편모 가정이어서 이사를 가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집도 원래 월세였고.”
“편모 가정이었나요?”
“네? 이야기를 들은 사람 말로는 그렇다고 하더군요. 아주 어릴 때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달아나버린 모양입니다. 그런데 또 진채윤은 그 어머니의 딸이 아니라 아버지가 바람났던 여자의 자식이었답니다. 임신이 안 되는 아내에게 주워온 업둥이라고 데려온 아기가, 나중에 알고 보니 바람난 상대에게서 난 딸이었던 거죠. 그 주변에서 꽤 유명했던 모양이던데요.”
“그렇다면 가정환경은 말할 것도 없겠군요.”
도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리고 또 물어보려던 것이 있었는데 말이죠.”
“뭡니까?”
“지난번에 진채윤의 팬클럽 비슷한 것이라고 했는데, 그게 대체 뭔가요.”
백인식은 아아, 하면서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진채윤 걔가 제법 예쁘다보니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은 많은데 정작 그녀가 그 중 하나를 골라서 사귀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하지만 대신 또 자기를 쫓아다니는 남자들 모두에게 굉장히 잘해주지요. 마치 꼭 친누나나……어머니처럼. 그러다보니 굳이 사귀겠다는 욕심보다 그냥 좋아서 따라다니는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중 누군가와 가끔 자주는 경우도 있거든요. 뭔가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면 한번 자준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런 걸 노리고 접근하는 사람도 꽤 많았습니다.”
“당신도?”
“……하하, 뭐, 그랬지요. 하하하.”
백인식은 내심 부끄러운 것인지 과장된 웃음을 터뜨렸다.
“한번쯤 먹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드는 여자니까요, 그녀는.”
그의 천박한 성적표현에 도희는 말없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동차를 몰면서 도희는 래이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핸들이 무거운 차량 특성상 차마 한 손으로 운전을 할 엄두는 내지 못하고 대신 이어폰 식 핸즈프리를 사용하고 있다.
『도희?』
벨소리가 약 20초 정도 울린 다음에 끊어지고, 래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나야. 별 일 없지?』
『응.』
『혹시 진채윤 그 여자가 아직도 병원에 있는 것 아냐?』
잠시 대화가 끊기고, 다시 래이가 대답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그래, 그러면 뭐 또 필요한 건 없고?』
『가능하다면 내 방에서 MD디스크를 가져다 줘. 번호는 0710.』
왠지 모르게 래이의 목소리가 가라앉은 것처럼 들린다.
『알겠어. ……그런데 정말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지.』
『일은 무슨』
도희는 래이의 태도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까지는 느낄 수가 있었지만, 그 이상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아마 이제 곧 병원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고, 이후는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면 될 일이다.
『그래, 가서 다시 이야기하자.』
그렇게 말하고, 도희는 전화를 끊었다. 그 직전, 도희는 래이가 뭔가를 자신에게 말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꼈지만 이미 전화는 끊긴 다음이었다. 도희는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조수석 시트 위에 떨어뜨리고 페달을 조금 더 세게 밟았다.
그런데 교차로를 하나 지나는 순간부터 갑자기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그래도 느긋하게 시트에 기대앉아 있었지만, 5분이 지나도록 10m도 나가지 못하자 저절로 등이 시트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뭔가 사고가 있었던 것 같다.
도로 위에서 일어난 사고와 래이가 뭔가 관계가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았지만, 그래도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도희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최근 통화기록을 찾아 다이얼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1분 동안이나 래이의 컬러링 음악인 영화 보디가드의 주제가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받지 않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직감하고, 도희는 차에서 내려서 뛰기 시작했다.
버려진 도희의 자동차 때문에 길이 또 막힐까봐 뒤차가 마구 클랙션을 울려댔지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전화가 끊기자 차갑고 건조한 손이 래이의 귓가에서 휴대폰을 치워버린다.
래이는 지금 자신이 있는 이곳이 어떤 장소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다만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서 흔히 나는 답답한 먼지 냄새가 사방을 꽉 에워싸고 있었고, 그 가운데 희미한 피 냄새가 났다. 그 피 냄새가 래이의 마음에서 점점 안정감을 빼앗아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냄새의 근원이 꽤 오래 된 것 같다는 점이었다. 신선한 피에서 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냄새가 났다.
주변에 빛이 있는지 아닌지도 잘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선그라스가 끼워져 있었고 그래서 그녀는 말해봤자 웬만한 사람들은 전혀 믿으려 하지 않을 모습들을 보고 있었지만, 그 이미지는 주변의 빛을 반사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빛의 유무를 판단할 근거는 도저히 되지 못하는 것이다.
래이는 공포를 느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힘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눈이 불편한 그녀는 단지 낯선 장소에 내던져지는 것만으로도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게 된다. 달아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도 없다.
래이는 이곳이 어떤 장소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고 있다.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이가 말해주었던 것이다.
래이는 자신이 조금 전의 전화통화를 통해 도희에게 알린 메시지를, 조금이라도 빨리 그녀가 알아낼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래이는, 있을 수 없는 것들을 보는 자신의 두 눈에 무시무시한 광경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
가지런히 늘어선 새하얀 이빨이, 자신의 손가락을 하나씩 차례로 물어뜯고 있다. 이윽고 손가락이 하나도 남지 않자 그 이빨은 이번에는 그 무딘 끝부분으로 사지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래이는 순간 정말로 자신이 먹히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윽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서서히 자신의 사지가 하얀 뼈 위에 불그스름한 살덩어리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그로테스크한 형상으로 바뀌어 가고, 마지막으로 그 이빨은 래이의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배 속에 이빨을 박았다.
따끈따끈한 피가 철철 흘러넘치는 배 속에 머리를 박고 정신없이 속의 내장을 먹고 있는 그것은,
맹수도,
무서운 괴물도 아닌,
그저 평범한 인간의 형상을 띄고 있었다.
도희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병실의 문을 열자, 불안한 예감이 그대로 현실이 되어 있었다. 병실은 텅 비어있었다. 침대 주변을 살펴보자 래이의 사이드백과 사용하던 MD플레이어, 오디오 북이 녹음된 MD디스크 따위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보였다. 이 방에서 사라진 것은 래이 자신과 착용하고 있던 빨간 선그라스 뿐이다. 도희는 다시 래이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찾아봤지만 병실 안에 래이의 휴대폰은 없었다. 이걸로 확실하다.
래이는 분명히 진채윤에 의해 납치당한 것이다.
도희는 자신의 휴대폰 통화내역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연락이 닿은 것이 약 20분 전. 만약 진채윤이 이동수단을 갖지 않고 있다면 도저히 멀리까지 갈 수 있을 시간이 아니다. 자동차로 우선 가까운 곳부터 찾아봐야 할까?
속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가 택시를 사용했을 가능성은 지워버려도 좋다. 누군가를 납치하려는 사람이 택시를 사용한다는 것은, 우선 심리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거기다 눈이 안 보이는 래이를 교묘하게 속여서 병원 밖으로 데리고 나올 수는 있었다고 해도, 말없이 택시에 태우려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소리를 지르거나 도움을 청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만약 사용한다면 자기 자신의 차나 아니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차를 빌릴 것이다. 그러나 진채윤은 아직 운전면허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그 단계에서, 도희는 대형 바이크를 갖고 있는 진채윤의 협력자를 떠올렸다. 하지만 바이크에 3명이 탈 수 있었을까? 아니, 어쩌면 우선 래이만 태워 보낸 다음 진채윤 혼자서 택시 같은 것을 이용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그때 도희는 갑자기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이 가정은 오토바이에 태워진 래이가 통행인을 향해 소리를 지를 가능성을 간과하고 있다. 제대로 하려면 그걸 가지고는 안 된다.
그렇다면 혹시 자동차를 가진 협력자가 따로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이 단계에서도 무리가 있다. 납치행위를 돕는다는 것은 평범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꽤나 리스크가 큰 행위이다. 물론 고의사고를 일으킨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은 전치 1주라고 해도 사실 경미한 수준의 타박상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기간은 거의 혹시 있을지 모를 사고후유증의 징후를 관찰하기 위한 시간이고, 그것이 교통사고에 대한 이 나라의 처리 관행이다. 그 정도의 사소한 부상을 입히는 짓보다는 오히려 납치라는 행위 쪽이 거부감이 클 것이다.
그 정도의 부담을 각오하고 진채윤을 도울 협력자가 과연 있었을까? 이 단계에서는 물론 어느 쪽으로도 속단해서는 안 된다.
도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병실에 버려져 있던 래이의 남은 소지품을 전부 챙겨서 차를 버려두었던 장소로 돌아가자, 견인차가 그 앞에 서있고 견인요원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 비싼 외제차를 견인해도 괜찮을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도희는 성큼성큼 걸어가, 그 중 한 명을 어깨로 밀치며 지나가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허를 찔린 견인요원들이 차창 너머에서 황당하다는 눈으로 도희를 노려보았지만, 이내 차라리 잘 되었다는 듯한 한숨을 쉬며 자신들의 견인차로 돌아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도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백인식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10초……20초…… 끊어버릴까 하고 생각한 찰나에 그가 전화를 받았다.
『네, 백인식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누님?』
『누님이 아니라 사도희입니다. 미안하지만 지금 통화 가능한가요?』
백인식은 왠지 느릿한 말투로, 『뭐, 안 될 것은 없습니다만.』이라고 말했다.
그 느긋함에 짜증을 느낀 도희는 조금 날카로운 말투로 말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진채윤의 팬클럽 중에, 자가용을 가진 이가 있나요?』
『글쎄요…… 아마 없었을 겁니다. 공교롭게도 그랬던 것 같네요.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죠?』
『중요한 건 아닙니다. 알려줘서 고마워요. 그럼…….』
『아, 잠깐만요!』
『……왜 그러죠?』
『누님, 그게 말이죠. 제가 사실…….』
『미안하지만.』
도희는 굳어진 목소리로 백인식의 말을 잘랐다.
『나는 지금 그런 이야기를 들을 시간이 없어요. 미안해요,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죠.』
백인식이 계속해서 뭔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도희는 냉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지금 도저히 그런 사소한 이야기까지 들어줄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화를 끊고, 도희는 자동차의 스티어링 휠에 가슴을 기대었다.
그렇다면 진채윤은 래이를 납치한 뒤 20분이란 시간을 활용해서 도대체 어디로 향했을 것인가? 그녀가 이동수단을 확인할 수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가정하면, 예상되는 이동반경은 아주 작을 수밖에 없다. 빠르게 걸을 수 없는 래이가 짐이 되었을 것이란 사실을 감안하면 반경은 또 극히 줄어들고 만다. 지금부터라도 재빠르게 행동하면 금새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순간 도희의 마음속에서 어떤 위화감 같은 것이 싹텄다.
과연 그럴 것인가.
나는 지금 뭔가 중요한 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닌가?
도희는 래이와 한 마지막 전화통화에서부터의 기억을 처음부터 다시 되살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금 했던 백인식과의 통화를 기억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이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도희?』
전화를 받은 래이가 처음으로 했던 말.
『네, 백인식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누님?』
그리고 다시 백인식이 통화에서 처음으로 했던 말이다.
둘 다 공통점이 있고, 그리고 그 공통점은 사실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째서 처음부터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인가.
생각해보면 아주 간단한 것이다.
눈이 불편한 래이는, 휴대폰의 액정에 표시되는 발신자 번호를 볼 수 없다. 당연히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기 전에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 휴대폰을 보고 래이에게 알려주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래이에게 자신의 존재를 나에게 알리게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 통화내용을 듣고 있었다. 래이가 함부로 허튼 말을 하지 못하도록.
바로 진채윤이다.
그 광경을 상상하니, 오싹 소름이 돋았다.
거기까지 이해하면, 래이가 자신에게 무엇을 알리고 싶었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도희는 다시 래이와의 대화를 상기했다.
『혹시 진채윤 그 여자가 아직도 병원에 있는 것 아냐?』
『……아니, 그렇지 않아.』
이 말은, 이 통화가 이루어졌을 때 이미 래이 자신과 진채윤은 병원에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즉, 진채윤에게 주어진 시간은 20분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녀는 어디로 향한 것일까.
아마 그 대답은 그 다음 있었던 대화에서 밝혀질 것이다.
『가능하다면 내 방에서 MD디스크를 가져다 줘. 번호는 0710.』
어떻게 생각해도 이것은 래이가 자신에게 남긴 힌트일 것이다.
도희는 곧바로 차를 몰아 래이의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래이의 방에 있는 MD 디스크를 모두 뒤졌음에도 불구하고 0710이라는 라벨이 붙은 디스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뿐 아니라 라벨에 숫자가 붙은 것은 하나도 없다. 대부분 오디오 북이거나 녹음용 디스크이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제목 대신에 숫자를 붙여 넘버링을 할 이유가 없다. 거기에 710이라는 큰 수…… 만약 그런 식으로 넘버링을 한 디스크가 존재한다면, 적어도 710번을 제외하고도 차례대로 709개의 숫자가 쓰여진 디스크가 존재해야 한다. 아무리 작은 사이즈의 MD 디스크라곤 해도 700개씩이나 모으면 엄청난 부피가 된다. 어딘가에 숨겨놓는다 해도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었다.
도희는 발상을 바꿔보기로 했다. 0710이라는 네 자리의 숫자는, 얼핏 보기에 패스워드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래이의 윈도우즈 패스워드가 바로 자기 생일이었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떠오르고 보니, 0710이란 숫자가 날짜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7월 10일.
과연 그 날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을까.
순간 도희의 머릿속에서, 그 날짜가 관련된 한 사건이 떠올랐다.
시체가 발견되어 최초로 사건화가 된 일자가 바로, 7월 10일.
최근 이 지역에서 아주 유명해진 사건이다.
……식인귀 사건.
사람의 것과 아주 흡사한 이빨 자국과 뜯어 먹힌 흔적이 남아있는 4구의 시체가 발견된 무시무시한 사건이다.
그 사건현장이 바로 이 근처에 있다.
아마도 래이는 그 장소를 알리려고 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이라면 좋겠지만…….
도희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자신의 마음 속에서 점점 커져가는 것을 느꼈다.
사건현장은 여전히 경찰의 출입통제 테이프로 봉쇄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건수사가 왠지 지지부진해짐과 함께 현장을 지키던 형사도 이미 철수한지 오래였고, 지금은 이미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리적으로는 주변에 인접한 건물이 없는, 소위 지상의 섬과 같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사흘 동안 시체가 완전히 썩어 들어갈 때까지도 사건이 백일하에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인 것이다.
콘크리트가 그대로 드러난 벽면의 이 2층 건물은, 본래 상업용도로 계획을 하고 건축하고 있었는데 도시 개발계획이 변경됨과 동시에 완공을 거의 앞두고 공사가 중단되고 말았다. 이 부근에 들어설 계획이었던 공공시설이 사소한 이유로 건설예정지를 변경해버린 것이다.
결국 건물주는 도저히 빚을 갚을 수 없을 것 같자 야반도주를 해버렸고, 시체로 발견된 4명은 빚 대신 그 건물에서 살고 있던 채권자 가족이었다. 채무자나 채권자나 다같이 사정이 나빴던 모양으로, 자신들이 본래 갖고 있던 집을 팔아서 급한 자금을 마련하고 대신 이 건물에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다.
실제로 건물 내부는 보기보다 썩 잘 꾸며져 있었다는 것 같다. 그 4명의 가족이 필사적으로 황폐한 건물을 자신들만의 주거공간으로 꾸몄던 것이다. 사무실에서 흔히 사용하는 파티션으로 공간을 분할해서 각각 방을 만들고, 뻥 뚫린 창문에는 저렴한 MDF 목재를 못으로 단단히 박아 붙여서 외풍이나 도둑을 막았다.
그랬던 것이 한달도 되지 않아서 벌써 폐허처럼 변하고 말았다.
왠지 숙연한 기분마저 든다.
그 네 사람은, 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노력하고 열심히 살았던 것일까…….
상징적인 의미에서든 아니면 현실적인 의미에서든, 단지 다른 사람의 먹이가 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하면 그야말로 허무하기 짝이 없다.
‘자본주의의 본질은, 사람이 사람을 먹는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도희는 천천히 그 기구한 사연을 지닌 건물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실내는 극도로 광량이 부족했다. 거의 암흑이나 마찬가지다. 공간을 가로지르는 콘크리트 벽과 거기에 더해진 파티션의 벽면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 마치 미궁을 방불케 한다.
……최초의 미궁이었던 크레타 섬의 미궁에는, 사람을 먹는 미노타우르스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갑자기 그런 신화가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그러나 건물 1층과 2층을 전부 둘러보았음에도 미노타우르스는 고사하고 사람도 하나 보이지 않는다.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발견한 도희는 천천히 3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주위가 너무 어두워서 발밑을 자세히 보고 걷지 않으면 넘어질 것 같다.
계단을 반 정도 올라간 시점에서, 도희는 어떤 하얀 물체가 계단 위에서 아래로 굴러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둔탁한 충돌음을 내면서 굴러와 도희의 발 앞에 멈춘 그것은,
손목이 잘린, 여자의 새하얀 손이었다.
심장이 얼어붙었다.
도희는 입을 꽉 다물고, 그리고…….
두 주먹을 세게 움켜쥔 채,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짐작대로 계단 앞에 누군가가 서 있다.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이 하나 있었고, 거기서 들어오는 미약한 빛에 의해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갈수록 그 모습은 점차 선명해졌고, 곧 그것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그것은 진채윤이 아니었고,
심지어 래이도 아닌,
……바로 백인식, 그 남자였다.
# by | 2008/08/23 03:29 | ┣완결 단편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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