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8월 29일
TS로얄 - Second Day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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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왜."
리엘은 사라의 말에 퉁명스러운 태도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사라가 뭔가를 불쑥 내민다. 자세히보자, 금속으로 장식된 화려한 검집와, 거기에 꽂힌 긴 직도 형태의 칼이 보인다. 리엘은 가만히 사라를 노려본 후 그것을 받아들었다.
"자, 무릎꿇고 목을 늘여."
"......뭐?"
"목 쳐달라고 하는 거 아니었어?"
"무슨 헛소리야!!!"
리엘의 농담에 길길이 날뛰는 사라. 그러자 리엘은 칼을 쑥 뽑더니 정말로 사라의 목에다 대고 겨눈다. 손잡이에서부터 쭉 곧게 뻗어나와있는 직도라, 물체를 베어내는데 우수하다고 하긴 힘들겠지만 사람의 목 정도는 쉽사리 떨굴 수 있을 예리함이 느껴졌다.
"시끄러워,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이 년아."
"......음."
그 말에,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입을 다무는 사라. 하지만 곧, 그게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여자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만다.
"그게 다 네 년 때문이잖아."
"그래서 어쩌라고?"
"사과하라고."
"아니, 너같은 거 말고 이 칼 말야."
......너같은 거로 취급당했다.
"......됐어, 그냥 이리 줘."
진저리를 치며 칼을 돌려받으려는 사라. 그러자 리엘이 묻지도 않은 질문의 답을 툭 하고 대답한다.
"사인검(四寅劍)."
"......응?"
"사인검이라고, 그거."
"......헤에, 한자 읽을 줄 아는구나."
그 말에, 리엘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같은 바보랑 같이 취급하지 말아줘."
"이게......죽을라고......"
하지만 결국 칼을 뽑진 않는다. 한숨을 내쉬며 칼을 왼손에 쥐고 늘어뜨리는 사라. 고풍스런 장식이 멋들어진 칼이, 그녀의 손 안에서 흔들린다.
"왠지 멋진데? 강력할 것 같아."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에 만든다고 해서 사인검."
가만히 해설을 덧붙여주는 리엘. 사실 무구에 대한 지식은 그다지 많다고 하기 힘들지만, 사인검에 대한 이야기는 예전에 한국사를 가르치던 교수에게서 들었던 기억이 조금 남아있었다.
"헤에......점점 더 멋진데......?"
"......하지만 왕권의 상징물."
"호오......왕의 검이란 말이지?"
이렇게까지 이야기해줘도 못 알아듣는 그녀가 한심스럽다고 생각하며, 리엘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너 말야, 왕이 직접 칼 들고 싸우는 거 봤어?"
"......아더왕?"
멋진 예를 들고 있었다. 순간 말문이 막히는 리엘.
"아니, 그런 거 말고! 우리나라에서 말야!"
"......광개토대왕?"
진짜 멋졌다. 하지만 리엘은 왠지 화가 난다고 생각했다.
".....에이씨, 어쨌든 그러니까 그건! 그냥 '왕권의 상징'일 뿐이지 실전용의 검이 아니란 말야!"
하지만 사라는, '중국검을 길게 늘여놓은 듯한 비실전적인 검'을 두 손으로 들어올리며 자랑스레 말한다.
"그러니까, 이게 '엑스칼리버'같은 거란 말이지?"
"......어이, 내 말 듣고 있어?"
"오오......보구인 건가! 설마, '약속된 승리의 검'을 쓸 수 있는 건가!?"
......안 듣고 있었다. 리엘은 그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하기야 뭐, 어차피 진품도 아닐테고......보아하니 잘 베이긴 잘 베일 것 같다. 그러면 뭐 충분하지. 리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어디로 갈 거야?"
정처없이 방황하기도 질린 리엘이 그렇게 묻자, 사라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대답한다.
"예전에 마음이 맞을 것 같은 애가 하나 있었어. 걔를 찾자."
사라는 예전에 자신이 금은콤비를 제의했던 은발의 여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특별한 의견이 없었던 리엘은, 그냥 생각없이 사라의 의견에 찬성했다. 그리고 그녀들은 은발의 여자-여자 13번 유영선-를 찾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근데 도대체 어디로 가야되지?"
"몰라, 일단 그냥 걸어."
"......"
......하지만 별로 바뀐 것은, 없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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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여교는 고민하고 있었다.
"......잠을 너무 많이 자버렸어."
아니, 너무 많이 잤다고 하기에도 모자랐다. 어쨌든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겨우 일어난 그녀였으니까. 그녀의 직업이, 주로 야간에 뛰는 일이 많았다는 점을 고려해도 이건 좀 너무한 감이 있었다.
"......어쩌지? 메이......"
지금은 자신의 곁에 없는 친구에게 묻고 있는 그녀. 아무래도 너무한 건 그녀의 늘어진 긴장감인 듯 했다.
"반드시 무사할 거야......메이는."
그 친구가 충분히 무사할 뿐 아니라 이미 사람도 한명 죽였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한 채, 여교는 방금 전까지 잠들어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 기지개를 켜자, 활동에 대한 욕구가 솟아난다. 여교는 배가 고프다고 생각하며 밖으로 나가 병원의 급식실로 향했다. 옆에 붙어있는 주방에 들어서자, 줄지어 늘어서있는 냉장고들이 보였다. 그 중 하나를 열어보자, 어째선지 냉동 레토르트 카레와, 징공포장된 쌀밥들이 가득 들어있는 것이 보인다. 왠지 뭔가 불합리해 보이는 구성. 그러나 여교는 전혀 고민하지 않고 그것들을 꺼내어 하나씩 뜯는다. 심지어 콧노래마저 불러가며.
찌익- 찌익- 찌익- 찌익-
"흐흐흥~"
찌익- 찌익- 찌익- 찌익-
......너무 많이 뜯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10인분은 될듯한 분량을 다 뜯더니, 레토르트 카레는 카레대로, 밥은 밥대로 큰 냄비에 털어넣는다. 그리고 가스를 켜서 데우기 시작.
"요리는 많이 할수록 더 맛있는 법이죠~"
실로 어처구니없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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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
탕!!!
총소리가 들리기 직전, 이미 고우키는 옆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뭔가 굉장히 묵직한 탄환이, 자신이 방금 서있던 위치를 헤집고 파고드는 것이 보인다. 방아쇠를 당길 때 나는 작은 쇳소리가 아니었다면 전혀 눈치채지 못할 뻔 했었다.
"이게......무슨!!!"
불같이 화를 내며 나무 뒤로 몸을 숨기자, 자신이 방금 구해주었던 붉은 머리의 여자가 엽총의 슬라이드를 당겨 재장전하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똑바로 자신에게 향해오는 총구. 고우키는 반사적으로 나무 줄기 뒤로 몸을 움츠렸다.
탕!!!
퍽!!!
다시 총성이 울리고 묵직한 탄환이 나무에 깊이 박히는 소리가 울린다. 크기로 보나 무게로 보나 평범한 탄환이 아니었다. 엽총이라면 보통 산탄을 사용하지만, 최초 타미에게 지급되었던 그 엽총에는 슬러그탄이 장비되어 있었다. 동시에 여러 발이 쏟아져 나가는 산탄이 아니라, 단 한발만 발사하는 대신 크고 무거운 만큼 훨씬 강력한 탄을 쏘아내는 탄종이다. 방탄차량을 뚫을 때도 사용하곤 하는 헤비급 탄환. 물론 고우키가 그것을 알고 있을 리는 없겠지만.
"칫, 뭔지는 모르겠지만......저건 피할 수 밖에 없나!"
작은 산탄이라면 어떻게 급소를 가리고 나머지는 몸의 근육으로 막아낼 방법도 있었겠지만, 저런 무식한 탄이라면 방법이 없었다. 고우키가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상대는 계속 위치를 바꿔가며 고우키를 압박해오고 있었다. 조금만 틈을 보여도 한발 제대로 먹고 말 그런 상황-!
"기껏 목숨을 구해줬더니......내 목숨까지 내놓으라니, 엉터리같은 짓은 정도껏 하란 말이다!"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한 고우키가 불같이 화를 내며 공중으로 자신의 몸을 띄워올린다. 시오가 공중으로 뛰어오른 그를 향해 총을 겨누자, 순간 고우키가 던진 작은 돌이 엽총을 맞춰 시오의 겨냥을 흐트러뜨린다. 아슬아슬하게 고우키의 옆을 비켜난 무거운 탄환. 그리고 엽총의 재장전을 하기도 전에, 고우키가 자신의 앞에 선 나무줄기를 두 다리로 밟는다. 마치, 나무 위로 걸어가려는 듯한 자세.
"우리얍---!!!"
그러나- 역시 나무를 수직으로 올라가진 못한다. 그 대신 거센 기합성과 함께, 반대쪽으로 튕겨나듯 점프하는 고우키. 온몸의 탄력을 최대한 살려, 약간 비스듬히 아랫방향으로 스스로 뛰어든다. 그리고 공중에서 자세를 반전- 한쪽 다리를 길게 뻗고 나머지 다리는 아래쪽에서 굽혀서 균형을 잡는다. 그대로 아래쪽의 목표인 나무를 향해 뛰어들어 삼각 날아차기를 먹이는 고우키.
우지직!!!
나무와 인간의 살이 부딪히는 소리라곤 생각하기 힘든 굉음이 울리고, 그다지 굵지 않은 나무 한그루가 그대로 쓰러진다. 굵어지는 대신 높게 자라나는 침엽수라곤 해도, 그래도 충분히 두꺼운 나무 한 그루가 그의 발끝에서 우지직 하고 부러져나간다. 자신의 머리 위로 덮쳐오는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시오.
콰드드득......쾅!!!
나무가 바닥에 쓰러지며 굉음을 낸다. 쓰러지면서 부러뜨린 주위 나무들의 가지가, 사방으로 떨어져내리며 시야를 가리는 틈을 타, 고우키는 재빨리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솔직히 말해, 그 여자가 이 정도로 죽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왠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
그리고 여자 11번 시오는, 고우키가 사라진 직후 나뭇가지를 헤치며 바닥에 나있는 구덩이에서 천천히 기어나왔다. 그 구덩이는 자신을 습격했던 남자 13번 신이 매복을 위해 파놓았던 구덩이였다. 고우키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에는, 이렇다 할 분함 같은 것은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저, 언제나와 같이 감정없는 희미한 미소만이 드리워져 있을 뿐.
......아니- 어쩌면 그 무감정이야말로, 즐거운 일-살인-을 성공하지 못했다는 그녀의 낙담을 나타내는 것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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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7번 나나는, 자신의 무기인 정체불명의 총을 소중히 끌어안고 길을 걷고 있었다. 방향은, 아무래도 주변에의 감시가 용이한 장소, 즉 전망대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곳에 선객이 있으리라는 사실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고, 그래서 그 선객과 마주친 순간 패닉에 빠져버렸다.
"소, 손드세요! 이 총은 보기엔 이래뵈도 사람 한두명 정도는 우습게 죽일 수 있는 총입니다! 아니 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수십명도 우습게 죽일 수 있습니다! 이, 이건 천상천하 일격필살포이니까요! 염동력이 있던지 없던지간에 지형보정없이 9999데미지를 입힐 수 있는 최강의 무기인 겁니다! 그러니까 레이저포라구요! 미국의 스타워즈 계획에서 부산물로 만들어진 초소형 레이저발진장치를 내장한 최신형 총인 겁니다! 그래서 이건, 진짜로 맘만 먹으면 액시즈도 떨어뜨릴 수 있다니까요? 암튼 이건 진짜 사테라이트 캐논인 겁니다! 맞으면 아파요? 아파서 죽을 지도 모른다니까요? 진짜 아프단 말예요! 어쨌든 이건 진짜로 하이메가 입자포인 거니까요! 그러니까 얼른 손들라구요!!!!!!!"
"......"
카르는,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쳐들어와서 엄청나게 긴 말을, 엄청나게 많은 느낌표를 사용해서 말하고 있는 여자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요상한 무기-천상천하 일격필살포인지, 레이저포인지, 사테라이트 캐논인지, 아니면 하이메가 입자포인지 모를-와 함께.
"......저, 저기."
"쏩니다! 쏜다구요!!!"
나나는 여전히 패닉 중. 손에 든 정체불명의 총을 마구 휘둘러대다가, 한번은 떨어뜨릴 뻔 하곤 다시 주워들어 카르를 겨냥한다. 끝에 달린 렌즈에서 불길한 빛이 반짝인다. 카르는 왠지 이 시츄에이션이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했다.
"이봐, 좀 진정하지 않겠어?"
"지, 지금 제가 진정하게 됐습니까?! 갑자기 납치되고 나니, 쉴 곳도 없고, 친구도 없고, 무기는 이 따위 쓸데없는 물건이고......"
"......"
"아, 이건 진짜 총이니까요! 날 무시하지 말란 말예요!"
......자신이 했던 말을 자신이 부정하고 있었다. 카르는 한숨을 내쉬며, 나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 쪽으로 걸음을 한발짝 내딛었다. 그 순간, 나나가 히익- 하는 소리를 내며 방아쇠를 당긴다. 순간 굳어지는 카르. 그러나 렌즈에서 잠시 빛이 번쩍 한 것 말고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걸 깨닫자 총을 내팽개치고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하는 나나. 카르는 그런 그녀를 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손에 들고 있던 자신의 무기-뾰족한 연필 몇자루-를 슬쩍 숨기고 나나에게 다가가 자신이 먹고 있던 것-레토르트 카레와 밥-을 내밀었다.
"......먹을래?"
대답은 없었다. 나나는 빼앗듯이 접시를 가로채더니, 마치 코를 박듯이 카레를 입 안으로 깨끗이 청소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쓰러지듯이, 전망대 1층의 소파에 드러누워 잠이 든다. 그 모습을 보던 카르는 앞으로는 좀더 경계에 신경써야겠다고 생각하며, 위의 전망대로 올라가 주위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응?"
순간, 카르는 자신의 몸에서 열이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미한 미열. 그러나 머리가 아픈 것은 아니다. 그 외의 증상은- 피부가 조금 간질간질했다. 카르는 손으로 팔뚝을 슬슬 긁으며, 나나의 총이 뭔가 효과를 발휘한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했지만, 그녀로서도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뭔가 이상한 부작용이 나타나지만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여자 3번 카르는, 다음 날이 되면 자신이 어떤 기묘한 상황에 놓이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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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13번 신은, 손에 넣은 보우건을 쥐고 즐거운 기분에 빠져있었다. 사용할 수 있는 화살이, 보우건 몸체에 꽂혀있는 예비분 5발 밖에 없다는 건 조금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화살은 재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다. 그러니까, 잘만 사용한다면 그 핸디캡은 없는 게 되는 셈. 신은 자신의 무기였던 전기충격기를 뒷호주머니에 넣고, 장전한 보우건을 왼손에 쥐고 조심스레 길을 걷고 있었다.
'다시 자리를 잡고 은신해서 적이 나타나길 기다릴까, 아니면......사냥감을 찾아 다니도록 할까......'
마치, 던전에서 파밍을 하느냐 아니면 필드에서 돌아다니며 사냥을 하느냐 정도의 무게감만 실린 말이었다. 온라인 게임을 하는 감각으로 자신의 전술을 짜는 신. 그는 새로 얻은 아이템의 위력을 생각하고, 필드사냥을 택하기로 했다.
'......방금의 그 괴물만 만나지 않으면, 이길 수 있겠지.'
보우건의 화살을 손으로 쳐내는 괴물. 신은 마치 야만인같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진저리를 쳤다. 그에게 맞았던 어깨는 아직도 통증이 심해 움직이기 힘들었다. 고우키가 삼각 날아차기로 나무를 부러뜨렸던 장면을 봤더라면, 아마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었다고 생각하겠지만.
바로 그때, 신은 새로운 사냥감을 발견했다. 혈색이 나빠보이는 하얀 얼굴의 남자. 몸에는 어째선지 긴 옷을 걸치고 있다. 분명히 일리시드......라고 하는 기묘한 이름의 남자. 신은 그를 다음 타겟으로 정하고, 천천히 보우건을 겨냥한 채 접근하기 시작했다.
"......손들어."
그리고 뒤에서 어느정도 거리를 띄운 채, 그렇게 경고한다. 그러자 별다른 동요없이 정말로 아무것도 갖고있지 않은 두 손을 든다. 신은 그걸 보며, 상대가 변변한 무기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덕분에 신은 기고만장해서, 거만한 목소리로 상대에게 명령했다.
"천천히 뒤를 돌아봐. 그래, 천천히......부디 날 자극하지 말라구. 나도 모르게 쏴버릴지도 모르니까."
"......"
협박 반, 농담 반으로 그렇게 명령하자, 여전히 묵묵히 뒤를 돌아본다. 하얗게 날이 선 피부가, 왠지 칼날처럼 보인다. 한 눈에 봐도 기억할 수 있을만한 기묘한 인상.
"......쏘지 않을 건가?"
냉정한 목소리. 그러나 신은, 그것이 냉정을 가장한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냉정을 깨뜨려, 자신의 우세를 확인하기 위해 상대방을 윽박지른다.
"쉽게 쏘면 재미없지 않아?"
"......그런가, 나는 잘 모르겠군."
마치 왜 자길 쏘지 않느냐고 진지하게 묻고 있는 듯한 태도에, 신은 화가 난다고 생각했다. 최초에는 상대에게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바로 공격하지 않았던 것이지만, 이런 식이라면 화가 난다.
"네 목숨은 지금 내게 달려있는 거라고. 그걸 모르는 건가?"
"......그래, 그거 참 좋겠군."
신은, 머리가 어떻게 된 녀석이라고 생각하고 혀를 찼다. 정말로 정신이 이상한 녀석이라면, 더이상 말해봤자 소용없다. 신은 곧바로 본론을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그건 어쨌든 상관없고......혹시 다른 녀석과 마주친 적이 있나?"
그러자, 시드는 잠시 고민한 끝에 대답했다.
"현재로선 두 명. 한 명은 직접 마주쳤고, 한 명은 멀리서 봤지."
"누구와 누구지? 이름과, 무기, 특징, 발견한 위치 및 시간을 말해."
신은, 게임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제 일보-정보-를 시드에게서 캐내고 싶었던 것이었다. 시드는 다시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대답했다.
"한 명은 네코......라고 하는 녀석이었지. 부분염색에 샤기컷을 하고 있어서, 알아보긴 쉬울 거다. 무기는 44구경 매그넘, 발견한 장소는 여기서 좀 떨어진 서쪽 숲 속. 시간은......글쎄, 아마 어제 오후경이었던가."
어제라면, 똑같은 위치에 아직도 있을 확률은 낮다. 하지만 그 무장은......군침이 도는 것이었다. 44구경 매그넘이라면, 아마 조금 전의 그 괴물도 잡을 수 있다. 신은 마침 좋은 정보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럼 다음은?".
좋은 정보를 얻었다는 희열에, 조바심을 내는 신. 그래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시드와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음......다음은, 분명히 메이라는 이름의 여자였지. 몸매가 끝내주는 여자라서,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어. 브라 사이즈는 아마도 D컵."
쓸데없는 것까지 말하고 있었다. 신은 짜증을 내며, 시드를 다그쳤다.
"그런 건 됐어! 다른 건!"
"그래......기다려보라고. 그러니까, 무기는 잉그램 기관단총과 사슬낫. 아, 사슬낫은 상대에게서 뺏은 거지. 살해당한 쪽은 리린이라는 이름의 여자. 근거리에서 온몸에 총알을 맞고 죽어버렸지. 정말 끝내주더군."
잉그램 기관단총......총알 분무기라는 별칭이 있을 만큼 명중율이 낮지만, 그대신 빠른 연사력과 작은 크기를 갖고 있어서 근거리에서는 상당히 강력하다. 신은 예전 FPS 게임을 즐기며 습득한 지식을 활용해 무장의 효용성을 평가하며, 이것도 꽤나 군침이 도는 아이템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발견한 장소와 시간은?"
그러자 왠지 대답을 못 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일리시드.
"글쎄......오늘 오전이었던 것 같긴 한데......장소가 말이지."
지금까지의 말투와는 다르게, 왠지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짜증이 난다고 생각한 신은, 그에게 한발 다가서며 강하게 시드를 다그쳤다. 하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반격을 우려한 듯 너무 가까운 거리로 다가가진 않았지만, 이미 시드와의 거리가 약 3m에 가깝게 줄어있음을 깨닫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 거리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시드는 눈으로 흘깃 거리를 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장소가 아마도 저기......"
"저기 어디란 말야!"
결국 답답함에 소리를 친다. 시드는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멍청한 자식-
"아- 그러니까, 저기 말이야. 저기."
그렇게 애매하게 말하면서, 손으로 자신의 어깨 너머를 가리킨다. 그 말에, 다시 한발짝 다가서는 신. 그러자 그 순간, 시드는 약간 멍청한 듯한 표정 위에, 희미한 비웃음을 싣고 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 혹시 내 이름을 알고 있나?"
갑자기 달라진 태도에 신은 조금 놀랐지만, 그래도 맨손으로는 닿지 않을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별로 공격당할 것을 걱정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분명히 일리시드였지. 그런데 그걸 왜 묻는 거지."
"......알고 있었군. 알고 있는데도 이렇게 날 얕본 건가......후후후."
정말로 안타깝다는 듯 웃는다. 계속되는 그의 기묘한 태도에, 신은 무심코 한발짝 물러났다. 아니, 물러나려 했지만-
"뭐, 뭐야?!"
어느새 자신의 다리를 감아오는 긴 물체들. 아니, 물체가 아니라 생물체의 일부였다. 마치 문어의 다리를 길게 늘여놓은 듯, 꿈틀꿈틀거리며 아래로 기어와 자신의 다리를 낚아챈 그것-
"......으앗!!!"
비명을 지르며 보우건을 쏘려고 하지만, 그 순간 '그것'들이 신의 두 다리를 낚아채버린다. 그대로 넘어지면서 하늘로 헛되이 보우건을 쏘아버린 신. 허겁지겁 다시 화살을 장전하려 하지만, 어느새 다가온 새로운 '그것'이 손을 감아 묶어버린다. 도대체 몇개인지도 모를 무수한 촉수에 온몸이 결박된 신에게, 천천히 일리시드가 다가온다. 새하얗게 날이 선 얼굴에, 예리한 칼날같은 비웃음을 띈 채.
"내 이름의 의미를 안다면......이렇게까지 무방비하진 않았을 텐데."
"크, 크윽......이, 이 괴물......!!!"
그렇게 상대를 매도하지만, 일리시드는 얼굴에 덮인 웃음을 지우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긍정하듯이, 두 팔을 벌리고 마치 연극을 하듯 드높은 목소리로 말한다.
"아아- 그것이야말로 내 이름. 무수한 팔을 가진, 이계에 사는 고고한 괴물- 주름지고 끈적하고 미끄러운 피부와 빛을 받지 못하는 살갗을 갖고, 여명조차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영원히 자신의 팔을 세어가는 자."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유일한 관객은 '그것'들에 온몸이 결박당하고, 눈이 가로막히고, 코가 틀어막히고, 입이 메워지고, 목이 졸려서- 죽어간다. 그리고, 일리시드의 일인극이 끝날 때쯤은 이미-
"......일리시드- 그것이 내 이름. 나의 모습. 그러니 그대들은 부디 그것을 명심할지어다."
남자 13번 신의 숨이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질식사해, 얼굴빛이 시퍼렇게 변해있는 시체를 보며, 일리시드는 차가운 냉소를 흘려보낸 뒤, '그것'들을 회수한다. 그의 긴 옷자락 사이로, 빨려들어가듯 모습을 감춰가는 '그것'들. 일리시드는 신의 무기였던 보우건만을 손에 집어들고 그 자리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신의 허리춤에 꽂혀있던 전기충격기는 그의 시체와 함께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남자 13번 신 사망 - 남은 인원 3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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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여자 12번 로리는, 남자 7번 네코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그가 은신하고 있던 동굴로 잠입해 들어갔다. 아쉽게도 나갈 때 권총을 가져가 버리긴 했지만, 나머지 그의 소지품들은 그대로 팩 안에 들어있었다.
'우후후......정말 조심성이 없군요.'
로리는 가방을 뒤져서, 지급된 소지품 중 하나인 물통을 찾아냈다. 그리고는 자신의 품에서 캅셀약을 몇 개 꺼내더니 그것을 하나씩 정성스럽게 벗겨낸다. 그리고 안에 든 가루약을 살살 물에 타넣는다. 대체 몇개나 넣었을까, 물 색이 변하지나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약을 섞더니, 이젠 그것을 마구 흔들어 용해시킨다.
'이걸로 완벽하군요.'
조용히 자신의 성공을 확신하고, 로리는 물통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다. 그리고 조심스레 다시 동굴에서 나가더니 그 주변에서 몸을 숨겼다. 그러자, 부주의하게 콧노래를 불러가며 네코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로리는 숨소리도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네코는 주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채 천천히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입구에서 가까운 곳에 털썩 주저앉는다.
"후우......물을 빼고 나니 목이 마른 걸."
'......좋았어!"
네코의 말을 듣고 로리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아니, 사실은 속으로만 환호하려 했지만 몸이 조금 움직이며 버석거리는 소리를 내버렸다. 고개를 돌려 동굴 밖을 응시하는 네코.
'아차......'
로리는 내심 식은땀을 흘렸다. 다된 밥에 재를 뿌릴지도 모르는 짓을 해버릴 줄이야.
'별 수 없네......'
마음을 굳게 먹는 로리.
"야, 야옹~"
실로 어설픈 고양이 흉내였지만, 네코는 그 소리를 듣고 뒤통수를 긁는다.
"뭐야......고양인가?"
실로 간단하게 믿어버린다. 아무래도 경계심 따위는 고양이 코딱지만큼도 없는 듯 했다. 그리고는 다시 물통을 찾기 시작하더니, 곧 팩에서 물통을 꺼낸다. 조금 남은 물이 찰랑찰랑하는 소리에서 청량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네코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물통의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물에 어떤 종류의 약이 녹아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푸하-"
물을 마시고, 다시 뚜껑을 잠근다. 그리고 다시 물통을 집어넣은 팩을 머리에 고이며 바닥에 드러눕는 네코. 로리는 긴장하며 그의 반응을 살핀다. 정체불명의 약- 로리의 무기였던 그것을 복용한 네코에게 과연 어떤 증상이 나타날 것인지 기대하면서.
'아마도 독약이겠죠, 그래도 무기라고 했으니......후후. 당신은 여기서 죽는 거예요.'
......악랄한 악당과도 같은 독백을 읊조리고 있는 작은 여중생이었다.
"......음?"
순간, 갑자기 네코가 눈을 뜬다. 예기치 못한 신체의 반응에 당혹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당혹감이 서린 얼굴이, 다시 괴로움 섞인 표정을 바뀐다. 그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고개를 처박고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로리의 귀여운 얼굴 위에 기쁨을 가득 담고 벌떡 일어선다. 그 서슬에 큰 소리가 났지만, 네코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오호호호, 독약을 먹은 기분이 어때요? 바보같은 아저씨!"
승리를 확신하고, 네코에게서 권총을 빼앗기 위해 다가가는 로리.
"크, 크으으윽......"
네코의 괴로운 듯한 신음성이, 조금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만든 것인지 로리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진다. 하지만 곧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네코의 허리춤에 손을 뻗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 네코-
"......이, 이건가?"
엎드려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네코의 허리춤에서 뭔가 딱딱하고 긴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손으로 붙잡는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 위해 잡아당기지만-
"어? 빠지지 않아?"
당황하는 로리. 어째선지 그것-굵고 길고 단단하고 '뜨거운' 것-은 그녀가 당기는 대로 딸려오지 않는다. 마치 몸에 달라붙어있는 것 같은 형국- 아니, 정말로 달라붙어있는 건가?
"이익, 얼른 내놓으란 말야!"
뜻대로 안 되자 성깔을 부리며 두 손으로 힘차게 잡아당긴다. 그래도- 여전히 바뀌는 것은 없다. 아니, 뭔가 바뀌고 있었다. 일단, '그것'이 갑자기 더 커졌다. 굵어지고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두 손에서 전해진다. 그리고- 네코가 로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히익-?!"
죽어가는 줄 알았던 네코가, 마치- 짐승같은 눈빛을 하고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눈에서는 사라졌어야 할 생명력이 가득하다. 아니, 생명력만 가득한 것은 아니었겠지. 시뻘겋게 불타오르는 그의 눈에서는- 어떤 종류의 욕구마저 생생하게 전해져오고 있었다. 로리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눈치채고 겁에 질려 달아나려 한다.
덥썩.
그러나- 어차피 어른남자와 어린 여자애. 달아날 수 있을 리 없었다. 금새 붙잡혀서 바닥에 쓰러뜨려지는 로리. 네코는 거친 숨을 헐떡이며, 로리의 가냘픈 몸을 위에서 짓누르고 있었다. 그제서야, 겨우 자신이 빼앗으려고 했던 물건의 정체를 확인한 로리의 안색이 창백해진다. 남자의 허리춤에는, 무려 두 개나 되는 권총이 있었다. 하나는 금속으로 된 진짜 권총.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아직 그녀는 본 적도 없는 미지의-
......여자 12번 로리는 자신에게 지급된 무기였던 '정체불명의 캅셀약'의 성분이, 그녀의 기대와 달리 독약이 아닌 '초강력 흥분제'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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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무=스테르는 갑자기 근처에서 묘한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누군가가 이곳에 접근하는 것을 보지는 못했었기에 조금 당황스럽다고 생각했다. 잠시 고민하더니, 자신의 무기-공구상자-에서 망치를 꺼내들고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자, 냄새가 더욱 진해진다. 무슨 냄새일까? 하무는 문득 그것이 카레 냄새-정말 어이없게도-같다고 생각했다. 혹시 카레 냄새가 나는 유독가스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몸의 반응을 확인한다.
'심장박동도 정상이고......피부에서도......발진은 생기지 않는 것 같은데.'
그래도 조심스레, 옷자락으로 호흡기를 막으며 천천히 주위를 탐색한다. 냄새가 진해지는 곳을 찾자, 곧 어딘가의 장소가 나타난다. 바닥에 타일이 둘러지고, 커다란 조리기구와 화구가 설치된 장소. 즉- 병원의 주방이었다. 그리고 그 구석에 걸쳐져있는 큰 솥. 조심조심 내부를 확인하자, 카레냄새의 정체가 드러난다. 아니- 드러나고 자시고도 없었다. 카레냄새가 나는 게 카레인 것은 당연했으니까.
"......."
갑자기 맥이 빠졌지만, 그래도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다. 왜냐면, 이런 게 있다는 사실은 이곳에 자신 이외의 누군가가 있었다는......
달각.
"......!!!!"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하무는 자신이 쥐고 있던 망치를 강하게 뒤로 휘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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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수가, 3:1 상황인가?"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엘크는 달리고 있는 자신의 다리에 힘을 더했다.
"늦지 않아야 할 텐데......!"
레이더에 비친 광점은, 조금 전에 접촉한 두 명과 한 명에 이어서 다시 다른 한 명이 그 세 명에게 접촉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처음의 세 명은, 최초의 접촉 이후에도 흩어지지 않고 모여있는 것으로 봐서, 평화교섭에 성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하나는......
"보인다! 아직 참극이 일어나지 않았기를-!"
순식간에 달려서, 병원 안으로 뛰어드는 엘크. 무기는 없지만, 그는 맨몸으로라도 싸움을 말릴 생각이었다. 순식간에 광점들이 위치하는 곳-주방-으로 뛰어든다. 모두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 크게 소리지르며-
"싸움은 그만 두시오!!!"
"......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뭔가 맥빠지는 대답이었다. 엘크는 순간 발이 미끄러지려는 것을 정신력으로 억제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닥에 깨져있는 유리 파편들을 치우고 있는 빡빡머리의 남자가 보였다. 그리고 커다란 솥에서 뭔가 노랗고 걸쭉한 것들을 퍼담고 있는 여자.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테이블에는, 뭔가를 허겁지겁-자신을 바라보지도 않고- 먹어치우고 있는 두 쌍둥이 남매.
"당신도 드시겠어요?"
조금 멍청해진 얼굴을 하고 있던 엘크에게, 여자가 조금 어색한 억양으로 그렇게 권해온다. 그러자, 그제서야 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던 냄새가 느껴졌다. 왠지 먹음직스런 카레 냄새-
"......그렇게 하죠."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 앉자, 곧이어 유리 파편을 다 치운 빡빡머리 남자가 자리에 앉는다. 왠지 허리춤에는 망치가 꽂혀있다. 그러자 손에 두개의 접시를 들고 다가오는 여자. 접시를 엘크와 빡빡머리 남자의 앞에 하나씩 내려놓자,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 순간, 동시에 접시를 내미는 두 쌍둥이. 어째선지 둘 다 사이좋게 턱끝에 노란 카레를 묻히고 있었다.
"한 그릇 더 주세요!"
"항 그륵 더 주에요!"
......한 쪽은 아직 입안이 가득한 모양이었지만, 쌍둥이는 동시에 그렇게 외친다. 그러자 여자가 접시를 받아들고 다시 솥에서 카레를 담아온다. 턱 하고 접시가 테이블에 놓이자마자 다시 고개를 처박고 식사에 열중하는 쌍둥이들-
"......."
엘크와 빡빡머리 남자-하무=스테르-는, 묵묵히 그 광경을 지켜보다 서로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바야흐로 세기의 정전협정이 맺어지는 순간이었다. ......전쟁이 일어났던 적마저 없던 것 같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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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구의 사나이는,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바이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험로를 달리기에 적합한 오프로드 바이크. 하지만 전복되면서 여기저기가 깨지고 부서져 있었다. 시험삼아 시동을 걸어보지만, 걸리지 않는다. 이젠 못 쓰게 된 것일까.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 주위에 쓰러져 있는 인간. 그리고 또다른 인간. 두 사람의 움직이지 않는 몸이 보였다. 천천히 다가가 상태를 '확인'하자,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둘다 의식을 잃고 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네거티브- 일부 수정. 한 쪽은 곧 생명에 지장이 생길 정도의 출혈을 보이고 있었다.
거구의 사나이는 재빨리 그의 응급처치를 행했다. 사실 꽤나 난폭한 솜씨였다. 그가 의식이 없었다는 것이 다행일 정도로.
빠르지만 대신 가차없는 솜씨로, 잘려나간 어깨부위의 혈관을 면사로 묶어서 지혈하고 붕대를 감는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타박상이 있긴 하지만, 처치를 요할 정도는 아니었다. 빠른 속도로 달리던 오토바이에서 전복되어 떨어졌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상처가 가볍다. 어째서 그렇게 된 걸까.
그는 고개를 돌려, 큰 상처를 입은 남자의 아래에 깔리듯 쓰러져있던 작은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 소년이 남자를 구한 걸까. 하지만 그에 비하면 소년의 상처도 무겁지 않았다. 네거티브- 아무래도 상처가 회복된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믿어지지 않는 자연회복율이다. 이 소년의 정체는 뭐지?
거구는 잠시 사고-해석-에 잠겼다. 그러나 대답은 계측할 수 없는 값이었다. 무한히 네거티브에 가까운 결과였다. 하지만 거구는 천천히 일어나더니, 의식을 잃은 두 사람을 양쪽 어깨에 짊어졌다. 아무리 한쪽은 가벼운 소년이라지만, 동시에 두 사람을 짊어진다는 것은 대단한 힘이었다.
그 상태로, 그는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한 군데였다. 팔이 잘리는 큰 상처를 입은 남자는, 지금 혈액이 부족한 상태였다.
남자 11번 오우=소르키르는- 남자 8번 니아와 남자 2번 클라우드를 어깨에 짊어진 채, 수혈할 피와 기재가 있으리라고 예상되는 장소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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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민가- 그러나 주위에는 다른 건물이 존재하지 않는 외딴 집. 그곳에서는 지금, 여자 8번 다크와 여자 9번 하루, 여자 10번 리카가 내부를 둘러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꽤 커다란 집. 선객이었던 하루가, 이곳저곳을 안내하더니 마지막으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보여준다.
"그런데, 자물쇠가 걸려이씀니다. 그래서 들어갈 수가 엄씀니다."
"흐음......?"
왠지 뭔가 있을 듯한 육중한 철제 문짝. 그리고 그 가운데 나있는 열쇠구멍이 보인다. 잠시 생각하다가, 자신의 '무기'였던 열쇠를 꺼내는 리카. 다크가 깜짝 놀라지만, 리카는 서슴없이 그것을 구멍에 찔러넣는다.
철컥.
"어......열렸다......?"
"우와아아......."
무심코 해본 듯 했지만, 자신도 진짜 열리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던지 깜짝 놀라는 리카. 다크는 어느새 리카의 등 뒤로 돌아가 있었고, 하루는 긴장된 얼굴로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를 확인하듯 다른 이들의 얼굴을 돌아본 리카는, 천천히 문에 힘을 줘서 그것을 열었다. 기분나쁜 파찰음과 함께 열리는 문.
......안은, 어둠이었다. 그것도 깊은 어둠이었다. 한치 앞도 안 보일만큼 깊은 암흑- 가장 담이 센 리카마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마음을 굳게 먹고 안으로 한발한발 내딛어 들어가기 시작하는 일행.
"이 안에......대체 뭐가 있을까요?"
"저도 궁금해요, 다크언니......"
"......꿀꺽."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자, 왠지 조금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뭘까- 왠지 조금은 익숙하기도 한 냄새라고, 리카는 생각했다. 글쎄, 언제였을까. 어디였을까. 어릴 때였을지도 모른다. 아마-
천천히 팔을 뻗어 앞을 더듬다, 리카는 문득 거칠거칠한 뭔가를 만졌다고 생각했다. 다시 손을 뻗자, 빡빡하고 뻣뻣한 털이 한가득 손에 잡힌다. 그리고- 그때서야 과거회상이 완료되었다. 정말 얄밉게도-
그건......동물원에서 맡았던 짐승냄새였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에.....? 꺄아아아아아-!!!!"
"......꺄아아아아아아악!!!!"
자신이 짐승의 털을 만졌음을 깨닫고 비명을 지르는 리카와, 아무것도 모른채 덩달아 비명을 지르는 하루, 다크. 그리고 그녀들은 뒤돌아 달아나는 리카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제서야 '그것'이 눈을 뜬 듯, 포효한다.
"크아아아아앙---!!!!!!"
"꺄아아아아악!!!!" x3
무시무시한 포효소리를 듣는 순간, 세 여자는 오금이 저려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다. 이젠 이미 달아날 기력마저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오는 두 발로 걷는 듯한 소리- 잠깐, 두발-?!
터벅터벅-
"곰?!!!! 어째서......이런 곳에에에?!!!"
"히, 히익?!! 잡혀먹힌다아---?!!!"
"어, 얼른 죽은 척 하는 검니다!!!"
흐릿한 광원 너머로 나타나는 갈색의 거대한 곰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제각각 패닉에 빠져버린다. 하지만 다시 곰이 포효하는 순간,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리는 그녀들. 그런 그녀들 앞에, 곰은 무시무시한 덩치를 흔들며 뒤뚱뒤뚱 걸어와......
할짝.
"......히익?!"
순간 다크의 얼굴을 핥는 곰의 두터운 혓바닥. 찐득한 침이 다크의 볼에서 흘러내린다.
"마, 맛을 보는 건가?!!!!"
발작하듯 비명을 지르는 리카. 그러나 그녀도 곰이 얼굴을 핥는 순간 딱 굳어버린다. 벌리고있던 입에 곰의 침이 조금 들어간 것 같지만, 전혀 눈치채고 있지 못했다.
"히, 히, 히익......!!"
드디어 마지막 차례- 하루는 자신을 덮쳐오는 곰의 넓직한 혓바닥의 위용에 벌벌 떨기 시작했다.
"......や, や, やめて---!!!"
그만 자신도 모르게 모국어로 그만두라고 외치는 하루. 하지만 아마 그녀도, 설마하니 곰이 자신의 말을 알아들으리라고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에......?"
그 순간 바로 딱 멈춰서서 하루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는 거대한 갈색 그리즐리 베어. 곰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하루는, 조심스레 용기를 내어 다시 일본어로 '御座り(앉아)'라고 명령했다. 다크는 그 말이, 유명한 일본 애니메이션 '견야차'에서 많이 들어본 것 겉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고- 중요한 것은, 곰이 정말로 그 묵직한 엉덩이를 소리내어 바닥에 부딪히며 '앉았다'는 사실이었다. 곰이 아직까지 2족 보행을 고집하고 있었기에, 마치 사람이 바닥에 앉은 것 같이 허리를 꼿꼿이 세운 모습이 되긴 했지만.
"......."
아직도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던 리카는, 문득 곰의 목 털 사이에 반짝이는 뭔가가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레 그것에 손을 대었다. 곰은 여전히 젊잖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치 앉아있는 테디베어같은 폼이긴 했지만.
"목걸이......MOMO라고 쓰여있어. 이거, 설마 이 곰의 이름인 건가......?"
"모모......인 걸까요. 그러면, 역시 이 곰은 길들여진......"
"어디 동물원에서라도 데려온 걸까요......"
마치 그 말에 대답하듯, 곰이 작게 '크헝-'하는 소리를 낸다. 그 예상치 못한 선물에, 리카와 다크, 그리고 하루는 한동안 그대로 멍하니 서로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거대한 갈색 그리즐리 베어- 설마 이 곰이 무기라는 걸까? 열쇠를 무기로 받았던 장본인이었던 리카의 표정은, 뭔가 잘못된 농담을 들은 사람의 얼굴처럼 보였다.
# by | 2008/08/29 21:21 | ┣TS로얄 | 트랙백 | 덧글(0)



